《산넘고 물건너》에는 샤오홍의 작품 6편과 샤오쥔의 작품 6편이 수록되어 있다.이 작품에 수록 된 대부분의 작품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사회상을 폭로하고 인민의 각성과 항쟁을 칭송한 것으로 현실주의의 진보적 색채를 분명히 띠고 있다.또한 동북에서 큰 파문을 일으켜 독자들의 광범위한 호평을 받았 고 샤오홍에게는 문학창작에 계속 종사할 수 있는 견실한 기초가 되었 다.《산넘고 물건너》의 출판은 물심양면으로 도와 준 수췬의 힘이 컸 다.그가 인쇄해 줄 사람을 찾지는 못했지만 자기 것을 최대한 아껴서 어렵게 지내는 부모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40원을 모두 인쇄비용으로 내 놓았다.이렇게 하여 비로소 두 사람의 첫 작품집《산넘고 물건너》를 하얼삔 《오일화보(五日畵報)》社에서 일천 부를 인쇄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을..
샤오쥔과 샤오홍의 이혼에 대해 친구들은 모두 안타까워했고,사람들 은 대부분 뚜안무홍리앙을 질책했는데,사실 이것은 매우 불공평하다. 샤오홍과 뚜안무홍리앙은 샤오쥔과 샤오홍이 헤어지기 전에는 결코 친 구 이상의 경계를 넘지 않았다.샤오쥔과 샤오홍이 갈라 선 후에야 두 사람의 관계에 비로소 질적인 비약이 있었다.샤오홍과 뚜안무홍리앙이 결혼 후 많은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고 소원해졌는데,이것은 샤오홍에 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샤오홍과 뚜안무홍리앙의 결합은 감정에 20)1937년 11월 중국공산당과 진보인사의 발의 하에 山東省 臨汾市에 설립했음.설립 목적은 항일에 실 질적 힘을 보태기 위함이었다.閻錫山이 교장을 맡았고,교사와 학생은 전국 각지에서 왔으며,교사로 는 蕭軍,蕭紅,李公朴,沈均儒 등이 있었다.이 대학..
아무리 재산이 많 아도 놀고먹으면 없어지는 법,여관에 600원이 넘는 돈을 빚졌다.왕은 지아는 자신이 집에 가서 돈을 가져와 빚을 갚겠다고 말하고는 임신한 샤오홍을 혼자 남겨두고 가버린 후 행방불명되었다.왕은지아가 떠난 후 여관 사장은 샤오홍이 빚을 갚을 돈이 없는 것을 알고 그녀를 기생 집에 팔아 빚진 돈을 받으려했다.제 몸 하나 둘 곳 없는 절망적인 상 태에서 샤오홍은 문예계에 구조 요청을 하기로 마음먹고 신문의 副刊에 투서했다.하얼삔 《국제협보(國際協報)》의 문예부간(文藝副刊)은 당시 하얼삔 신문 가운데 진보 성향이 비교적 짙었는데,샤오홍은 이 신문을 자주 봐 오면서 이 신문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그래서 1932년 7월,하 얼삔의 《국제협보》 문예부간의 편집인 페이신위앤(裵馨園)에게 구조 를 요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