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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돈황곡자사(敦煌曲子词)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곡자사(曲子词)는 수당(隋唐)연악(燕乐)의 산물이다.연악(燕乐)은 대량의 곡조가 고정된 악곡이 유행하게 하여,성도사(声度词-음악과 가사가 결합되 는 방식으로 가사를 창작하는 것을 말함)가 보편적인 가사 창작방법이 되었 고,가사(歌辞)는 일종의 문학작품으로 되어 탄생되어,곡자사(曲子词)로 일 컬어지게 되었다.돈황곡자사(敦煌曲子词)는 돈황(敦煌)동굴에서 발굴된 작 품을 가리킨다.그것은 민간에 유전되던 통속문학으로,곡자사(曲子词)가 사 (词)로 변화되기 전의 형태를 반영하고,문인의 창작과는 매우 다른 차이가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주제가 풍부하고 제재가 광범위한 것은 돈황곡자사(敦煌 曲子词)의 뚜렷한 특징이다.바로 《돈황곡자사집(敦煌曲子词集)》을 예로 들어 말하면;“변방의 객이나 나그네의 탄식하는 소리,충신과 지사의 장엄 한 말,은둔 군자의 유쾌한 정과 즐거운 뜻,젊은 유생의 열망과 실망,의사 의 의사의 가결 등 곡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有边客游子之呻吟, 忠臣义士之壮语, 隐君子之怡情悦志, 少年学子之热望与失望, 以及佛子之赞 颂、医生之歌诀,莫不入调)”라고 하는데,그것의 작자 부류들은 대단히 광범 46 위했다. 형식상으로 보면,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유창하고 참신하고,표현성과 이야기들로 풍부한 것이 돈황곡자사(敦煌曲子词)의 특징이다.사(词)는 일반 적으로 단편(单片)과 쌍편(双片)으로 한 편을 이루는데,하지만 돈황곡자사 (敦煌曲子词)는 여러 수(首)및 수십 수(首)의 연속된 장(章)을 사용하는 체 제이다.이러한 이유는 :사(词)는 술잔 앞이나 꽃 사이의 주연에서 소창(小 唱)단계를 거쳤지만,그러나 곡자사(曲子词)는 “반복하는 것을 다투어 능함 으로 삼는(反复以竞胜)”민간 가요계의 답가(踏歌-발로 박자를 맞추어 부 르는 노래)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사(词)의 예술수단은 늘 단순한 정경묘사이지만 그러나 돈황곡자사(敦煌曲子词)는 이와 달리 대화(예 를 들면 두 조(组) 《도련자(捣练子)》“맹강녀(孟姜女)”)、문답(예를 들면 《남가자(南歌子)》“풍청문답(风情问答)”、일인칭대명사(예를 들면 《봉귀운 (凤归云)》“노녀견정(鲁女坚贞)”)、이야기 서술(예를 들면, 《주천자(酒泉 子)》“범황궁(犯皇宫)”)등 풍부한 성격화、이야기화 된 표현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그것들은 각각 민간무대예술의 역할인 대창(对唱)、“관두(款头)”、 “희농(戏弄)”、“설화(说话)”등의 형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이러한 점 은 사(词)는 단순한 가창에 연원을 두고는 있지만,그러나 곡자사(曲子词)는 이와 달리 희극과 곡예에서 광범위하게 예술형식을 수용하고 있음을 나타낸 다.이 밖에,돈황곡자사의 언어는 통속적이고 생동적이다,“양눈은 칼과 같 다(兩眼如刀 )”의 용모 묘사,“파수꾼이 진흙 인형 같다(把人尤泥)”의 정태 (情态)묘사,“가는 손 움직이니 모두 푸른 버드나무네(纤手令行匀翠柳)”의 동작 묘사,“은병을 양손으로 거머쥔다(一 只银瓶子两手拴)”의 비흥(比兴)은 모두 문학묘사를 위해 새로운 어휘를 제공해주었다.《보살만(菩萨蛮)》“천 반원(千般愿)”은 7종류의 불가능한 일을 연이어 들어 애정의 변하지 않음을 비유하고,수사 수법상에서 대담한 창조성을 표현하였다.이러한 예술방법 은,돈황곡자사(敦煌曲子词)의 언어 음악성을 충분히 표현하였다. 22.“화간사인(花间词人)”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대(五代)때,후촉(后蜀)의 조숭조(赵崇祚)는 온정균(温庭筠)、황보송(皇 甫松)、위장(韦庄)등 18명 작가의 사(词),총 500수(首)를 수록하여 《화간집 47 (花间集)》을 편찬하였는데,이러한 작가는 사풍(词风)에서 대체적으로 일치 하여,후세는 그들을 “화간사인(花间词人)”혹은 “화간파(花间派)”라고 부른 다. 화간파(花间派)의 주요 대표는 만당(晚唐)의 온정균(温庭筠)이다. 그는 음률에 정통하고,사조(词调)에 능통하여,“거문고와 피리의 음을 쫓 을 줄 알아,화려한 글을 지었다.(能逐弦吹之音,为恻艳之词.)”《구당서․온 정견전(旧唐书․温庭筠传)》,중국 문학사에서 최초로 대량으로 사(词)를 지 은 문인이다.그의 사(词)는 현재 60여수(首)가 존재하고,대부분 부녀자의 정을 썼다.일부분의 사(首)는 여러 부녀자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동정을 나 타내고,동시에 또한 그가 배척당해 생긴 불만의 정서를 토로한다. 온정균(温庭筠)사(词)의 풍격(风格)은 농염하고,성률은 조화롭고,사(词) 의 뜻은 함축적이어서,사람으로 하여금 맛을 찾게하는데,예로 《보살만(菩 萨蛮)》(小山重叠金明灰)、《경루자更漏子》(玉爐香)이 있다.사의 예술방면 에서 온정균은 아주 높은 성과를 가지고 있고,이는 훗날 사(词)의 예술특징 의 형성에 도움을 주고,사(词)의 발전에 촉진적 작용을 끼친다 라고 말할 수 있다.하지만,그의 사(词)제재는 비교적 협소하고,지나치게 유약함을 표현하고,사(词)의 구 또한 지나치게 조탁을 하여,당시와 후세에 여러 소 극적 영향을 지니게 하였다. 화간사인(花间词人)중 온정균(温庭筠)과 명성을 나란히 하는 이는 위장 (韦庄)이다. 그의 사(词)는 현재 50여수(首)가 존재하고,언어는 수려하고,대부분 자연 스러운 수법을 이용하여 부녀자의 정과 이별의 슬픔 그리고 유람 생활을 묘 사한다,예를 들면 《여관자(女冠子)》 2수(首)、《보살만(菩萨蛮)》 5수(首) 등이 있다. 특히 《보살만(菩萨蛮)》 5수(首)는 백거이(白居易)、유우석(刘禹锡)《억 강남(忆江南)》등 작품의 풍격(风格)을 계승하고 있고,이욱(李煜)사풍(词 风)의 선구가 된다.화간사인(花间词人)에서 위장(韦庄)의 사(词)는 온정균 (温庭筠)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함축적이다. 48 23.이욱(李煜)은 어떠한 한 사인(词人)인가? 이욱(李煜)은 남당(南唐)중주(中主)이경(李璟)의 여섯 째 아들이고,후에 부친의 자리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어,남당(南唐)후주(后主)라고 칭한다.그 의 사(词)중에서 유전되어 전하는 것은 겨우 34수(首)뿐으로,비록 수량에 서는 비교적 적지만,그러나 예술성취는 아주 놓아,이로 인해 그는 사단(词 坛)에서 일류 작가의 서열에 놓여진다,역대 평론가는 그의 사(词)에 대해 모두 대단히 추종을 하는데,예를 들면 왕국유(王国维)는 《인간사화(人间词 话)》에서 말하기를:“사가 이후주에 이르면 감정 표현은 깊어지고,점점 더 살을 다듬어 장인의 사로 변하고 사대부의 사가 된다.(词至李后主而眼界使 大,感慨逐深,遂变伶工之词而为士大夫之词.)” 이욱(李煜)사(词)는 남당(南唐)멸망을 전후해 전환기가 되는데,대체적 으로 전후 양기로 구분할 수 있다.전기 사(词)는 궁정생활을 소재로 한 것 이 적지 않고,이는 그의 황제 신분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이러한 사(词)는 예술기교에서 비록 독특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그러나 내용면에서 대부분 취하기는 부족하고,단지 이별의 정서를 묘사한 여러 서정 소사(小词)만이 오히려 사람에게 참신한 느낌을 준다.예를 들면 《청평락(青平乐)》 봄이 오고 님과 이별하니,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슬픔 뿐 애간장 다 끊어 진다.섬돌 아래 떨어진 매화는 눈처럼 흩날리고,온 몸을 털어내어도 다시 가득하다.제비는 돌아오는데 님 소식은 없네,길은 멀어 돌아오는 꿈조차 이루기 어렵네,이별의 한은 마치 봄풀 같네,아무리 멀리 가도 다시 생겨나 네 别来春半, 触目愁肠断. 砌下落梅如雪乱,拂了一身还满.燕来音信无凭, 路遥归梦难成.离恨恰如春草,更行更远还生. 상반결(上半阕)은 주로 풍경을 묘사하지만 그러나 풍경 속에 정을 기탁하 고 있고,감정과 풍경이 하나로 융합된다.“(砌下落梅如雪乱,拂了一身还满)" 49 은 사(词)에서 주인공이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거의 실성한 사람의 지경에 이르는 정신상태를 세밀하고 형상적으로 그림을 새겨내고 있 어,대단히 심오한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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